단색화를 이끈 하종현 화백의 예술 여정
하종현 화백은 1935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나셨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신 이후 한국 추상미술의 발전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특히 1970년대에 등장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 운동의 핵심 인물로 손꼽히며, 독창적인 기법과 철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오셨습니다.
대표작인 ‘접합(Painting-Connect)’ 시리즈는 단색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기존의 회화 방식과는 전혀 다른 표현 방식을 통해 회화의 개념을 확장시키셨습니다.
배채법: 하종현 화백만의 독창적인 화풍
하종현 화백님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배채법(背彩法)’, 즉 뒤에서 채색하는 기법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회화는 캔버스의 앞면에서 물감을 칠하지만, 화백께서는 캔버스 뒷면에서 물감을 밀어 넣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물감은 천을 통과해 앞면으로 스며들며,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색면과 질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마치 숨을 쉬는 듯한 생동감 있는 화면이 탄생하며, 이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작가의 철학이 오롯이 담긴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채법은 단순히 기법적 특이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는 ‘기다림’과 ‘비움’, 그리고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자세’라는 동양적 사유가 녹아 있으며, 바로 이 점이 하종현 화백님의 예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색채에 담긴 철학
하종현 화백님께 색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닙니다. 색은 감정, 존재, 자연, 그리고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는 하나의 언어입니다. 특히 흙빛, 황토색, 옅은 자주색 계열의 색상은 작가님께서 자연과 깊은 교감을 통해 길어올린 색입니다.
이러한 색채들은 서양 추상표현주의의 강렬하고 직접적인 감정보다는, 조용하고 깊은 내면의 울림을 전합니다. 화백님께서는 "색은 내면에서 우러나야 하며, 그 자체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색채는 그래서 더욱 절제되고, 때로는 묵묵하지만, 오랜 시간 관람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느림과 침묵 속에서 피어난 예술
하종현 화백님의 작업 철학은 ‘비움’과 ‘기다림’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 속에서도, 그는 느린 호흡과 깊은 침묵 속에서 캔버스를 마주하시며 작품이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기다리십니다.
이는 마치 선승의 수행과도 같은 태도입니다. 작가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 자연의 흐름과 물성(materiality)을 존중하며, 색과 형태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를 바라시는 철학이자 태도입니다. 이러한 철학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관람자에게 일상 속에서 잊기 쉬운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국내외 미술계의 조명
하종현 화백께서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 해외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시며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셨습니다. 유럽에서 열린 다수의 전시회를 통해 단색화의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망라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작가님의 예술 세계가 어떻게 발전하고 심화되어 왔는지를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구순의 나이에도 멈추지 않는 창작 열정
놀라운 점은, 하종현 화백님께서는 구순을 맞으신 지금도 여전히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움을 향한 탐구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최근 작품에서는 더욱 간결한 색감과 형태가 돋보이며, 그 안에는 시간이 만들어낸 깊이와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단순한 회화를 넘어, 인생과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 스며든 예술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하종현 화백의 90주년 기념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든 예술적 기록이며, 색과 철학,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미학이 어떻게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기회입니다.
그의 작품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한국 미술의 깊이를 느끼고 싶으시다면, 그리고 예술을 통해 삶을 다시 바라보고 싶으시다면, 이번 전시회는 꼭 경험해보셔야 할 시간입니다.
KUKJE GALLERY
Since KUKJE GALLERY opened at the center of Seoul in 1982, it has been committed to presenting the work of the most current and significant Korean and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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